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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이런 시국에 이런 미운 생각

드디어 올 것이 왔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다) 대중들에게 상황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진지 이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주절주절 써본다...

 

사실 이 나라의 안일한 반응에는 할 말이 아주 많다가도, 너무 많아 전부 말 할 기운조차 없어진다. 이탈리아에서 이미 확진자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 내 휴가가 끝날 무렵부터 계산해도 이미 삼 주가 넘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 그동안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은, 중국에서 시작해서 동아시아를 휩쓸 무렵부터 아주 차고도 넘쳤다고 생각한다. 지구 반대편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신경은 1도 쓰지 않고, 그들은 그 사이 국뽕맛에 취해 브렉시트나 신나게 하고 있었다. 

 

바로 옆나라에서 확진자가 급증하니 그제서야 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생각한 것일까, 구독은 하지만 제대로 챙겨보지 않는 뉴스 계정에 유난히 관련 기사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온 종일 코로나 얘기만 하고 있다. 기억하기로는 정확히 일주일 전, 목요일 즈음부터 거리에 사람들이 급감하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정말로, 믿을 수 없이 사람이 없어서 어쩔 때는 매장 안에 손님 수보다 직원 수가 많을 정도였다. 정말로 놀랍도록 한가했다.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고, 내가 어처구니가 없었던 일 첫 번째는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품들이 슈퍼마켓에서 죄다 사라진 것이다. 도시락을 싸기 위해 푸실리를 사러 갔는데 500그람짜리 한 봉지만 남아 있었다. 그 때의 충격이란... 양이 많을 수록, 무게 대비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나는 1키로짜리 큰 봉투를 사려고 했는데 없어서 못 샀다. 이럴수가! 게다가 파스타를 사람들이 하도 많이 사 가서 1인 2봉으로 구매수량이 제한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파스타 소스와, 캔에 들은 야채, 곡물까지 마치 전쟁이라도 곧 터질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주 기함할 노릇이다... 얘들아 'Keep calm and carry on'이라며. 친구랑도 얘기했지만 그들은 절대 'keep calm'하지 않는다. 'keep panicked and carry on (not wearing masks)'이다. 정말,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지만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아주 잘하는 노릇이다... 

 

지난 주말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얘기했다가 동료로부터 헛소리를 듣고 화가 나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다. 우리는 일요일까지 마스크를 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아주 개노답이다.) 장갑은 지급이 되어서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말이었다. 비말감염이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는 것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제일 우선시되어야 할 예방 방법인데 마스크는 쓰지 않고 장갑만 껴서 뭐가 도움이 되냐, 이건 완전히 말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했더니 손이 더럽기 때문에 장갑을 껴야한단다.... 얘들아... 설마, 장갑의 표면은 더러워지지 않는 것일까...? 이 얘기를 집주인에게 했다가 다시 분노가 치밀었던 일은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은 그의 공감능력과 대화 스킬의 부족함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도 나를 매우 화나게 한다. 그 후로 다시 대답을 짧게 하며 거리를 두고 있다. ㅠㅠ)

 

식료품이 탈탈 털린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진통제 종류가 전부 멸종된 것도 어이가 없었다. 어제부터 생리를 시작한 바람에 갖고있던 진통제를 다 먹고, 새로 사야했던 나는 드럭스토어 두 군데와 슈퍼마켓 세 군데를 들려서 겨우 한 종류를 찾을 수 있었다. 겨우 한 종류! 게다가 가장 흔한 이부프로펜이 코로나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 때문에 파라세타몰을 찾아다니다보니 더 구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이부프로펜이고 파라세타몰이고, 아스피린까지 포함해서 모든 진통제가 전부 멸종되었다. 아마도 오늘 변경되기 전까지의 (매우 멍청한 빡대가리) 정부 지침 때문인 것으로 알고있다. 아프면 7일간 집에서 쉬라니, 나름 의료보험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이런 무책임한 조치는 대체 무엇인란 말인가, 개쩌는 의료보험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 온 아시안 걸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요... 다른 색 패스포트를 가진 나는 그렇다 치고, 그들은 대체 뭐때문에 열심히 세금과 보험료를 낸 것이었을까? '알아서~ 집에서~ 쉬세요~' 같은 소리 들으려고 낸 건 아닐텐데.

 

아무튼 오늘도 슬쩍 들려본 드럭스토어에는 여전히 진통제가 없고, 수퍼마켓에도 파스타와 깡통들은 없다. 이렇게 사람들은 'Panicked'하고 있는데 마스크는 꾸준히 안 쓴다. 나는 오늘부터 이동하는 동안에는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시안걸에 '마스크를 씀' 속성이 붙으니 기분 탓인가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이 묘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며칠 전, 집주인이 '이게 모양이 fashionable하지 않아서 (네가 꺼리겠지만)' 라는 말을 했을 때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필터가 달린 심각한 외향의 마스크를 쓰기 꺼려 했던 것은 나 개인의 불편함도 있겠지만, 뭣보다도 그런걸 내가 썼을 때 나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제일 컸던 것 같다. 과연 내가 한국에서도 돔형의 마스크를 모양 때문에 쓰기 꺼려했을까? 지난 메르스 사태 때도 그런 모양의 마스크를 써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구매하지 않은 것은 날씨가 매우 더웠기 때문이었다. (그 더위에, 부직포 마스크만 쓰고 다녀도 얼굴에 습기가 차서 불쾌한데 돔형마스크는 어떻게 쓴단 말인가!) 그걸 깨달으니 이어서 또 화가 나는 것이다. 집주인은 제1세계 백인남자니까, 나 자신도 인과관계를 깨닫는데 시간이 걸릴 정도로 척수반사적인 고민과 두려움을 할 기회도 필요도 없겠지. 나는 얇은 회색 마스크를 쓴 것만으로도 몸을 더 사리고 누가 날 해코지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는데. 

 

가디언지 아티클에서 'Maskaphobia'라고 하던데 이런 우습고 미개한 단어도 없다. 마스크를 쓰면 막 무섭고 두렵다니, 개복치인지? 쓰던 휴지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쓰는 모습이 흔하게 보이는 문화권에서 내가 뭘 바라나 싶기도 하다. 

 

제발, 아둔한 머리에 적어도 '학습'이라는 기능이 붙어있어 이번에 그 기능을 좀 써 보길 바란다. 뭐, 사실 마스크를 쓰라고 강하게 권장하지 않는 정부 꼬라지만 봐도 별로 희망은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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