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유럽 대륙이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을 때 (혹은 심각한 상황이 이미 닥쳤으나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밀라노와 피렌체에 다녀왔다. 잘 놀다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폭풍전야와 같았다.
본래 올해 초 밀라노행을 결정했던 것은 패션위크에 모 배우가 오지 않을까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항공권을 지르는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태가 발생했고(...) 그것이 이렇게 길게 지속될 것이라 생각치 못했으나 1월 말 무렵부터는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ㅎㅎㅎㅎㅎㅎ 그래서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은 없었고, 느긋하게 맛있는 거 먹고 쇼핑이나 하는 게 이태리행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사실 계획없이 떠나버리는 것이 점점 더 습관처럼 되어가고 있기는 하다. 스마트폰이 있으니 바로바로 검색이 가능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예전에는 출발 전에 하루동안 다닐 동선을 꽤 구체적으로 정해두곤 했는데 요즘은 구글맵에 핀 여러개 꽂아놓고 전날 누워서 오늘은 이쪽을 돌아볼까, 하고 정한다. 예전에 유럽 여행을 왔던 때를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달라졌다. 그때는 하루를 아침부터 밤까지 아주 열심히 죽어라고 돌아다녔는데 요 몇년 사이에는 저녁에 휴식을 충분히 취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경험이 쌓이다보니 더 요령이 생긴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2월 말의 런던은 여전히 날씨가 구질구질한데 밀라노는 이미 봄날씨였다. 도착하자마자 그냥 행복했다.
숙소가 나빌리오 운하 근처였는데 마침 주말이라 빈티지마켓이 크게 열려있었다. 날씨도 좋으니 사람들도 많이 나왔다. 사실 숙소를 중앙역 근처로 잡을까 고민하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잡았는데, 이쪽으로 잡길 정말 잘 한 것 같다. 몰랐는데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도 많고, 조용하고 깨끗해서 늦게 돌아다녀도 안정감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운하가 있어서 아침마다 역까지 걷는 길이 기분 좋았다.
소품도 소품이지만 가구가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많았다. 이 돌아가는 책장은 정말 갖고 싶었는데 (가격도 저렴했다!) 내가 이걸 산다고 어떻게 싸들고 오겠나... 그저 안타까울뿐.
운하를 따라서 바와 식당, 카페 등도 늘어서있다. 지나가다 보인 조그만 베이커리에서 쿠키를 한 봉다리 샀는데 말 할 필요도 없이 맛있었다. 이전에 로마에 갔을 때도 그랬지만, 조그만 케이크와 쿠키를 무게로 달아 파는 베이커리들이 너무 좋다. 종류도 많고, 아무거나 골라도 다 맛있고. 사실 이탈리아는 뭘 먹어도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가격대비 맛이 매우 불만족스러운 곳에 살다 보니 기준이 너무 낮아졌나.
첫 날 저녁은 일본식 카페 겸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했다. 여기 정말 맛있었다. (Tenoha Milano)
조금 실수했던 것은, 당연히 오후 6시무렵부터는 저녁메뉴를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보다 조금 일찍 맞추어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저녁은 8시부터라고 한다... 그 전까지는 티와 술, 간단한 먹을거리만을 주문할 수 있다.
그래서 원래는 가츠동이었나, 돈가스였나, 아무튼 좀 거하게 먹을 생각을 하고 갔는데 고를 수 있는 메뉴 중에 식사처럼 먹을 수 있는 건 우동밖에 없어서 그걸 주문했다. 별 기대도 없었다. 한국에서도 우동 맛있는 집이야 많이 가봤고, 일본에서도 우동 먹어봤고, 솔직히 이쪽 동네 우동은 너무 먹고싶어서 갔다가 실망하기만을 반복했던 기억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동이 정말 상상초월로 맛있었고, 심지어는 여태 먹어본 우동 중 손꼽을 정도였다. (맛있는 우동을 너무 오랜만에 먹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국물을 처음 맛보았는데 맛은 물론이고 불맛이 나서 1차로 충격을 받고, 면을 먹었더니 이건 수타로 뽑은 면의 식감이었다... 반숙한 계란도 완벽했고, 한참을 먹다가 깨달았는데 유자 껍질을 얇게 썰어 올려둔 것이 상큼함을 더해 정말 신선했다. 고기도 잡내 없이 아주 깔끔했다. 정말 맛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져서 술을 주문했다. 몰랐는데, 알고보니 술을 주문하면 사이드로 안주를 같이 주었다. 야채랑 계란말이가 들은 초밥, 야채튀김, 가라아게를 준다. 뭐, 거의 준 식사다. 깍지콩도 그냥 줬다. 돈을 따로 내야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계산서를 보니 술값에 다 포함되어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돈 쓸 생각으로 신나게 주문하다가 나중에 너무 많이 썼나,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얼마 안 나왔다. 거기다 굉장히 만족스럽게 식사를 했으니, 굉장히 저렴하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날 이 식당에 한번 더 가려고 했는데 (옆에 일본식 라면집도 있다.) 그날부터 락다운이 시작되는 분위기여서 여기도 문을 열지 않았다...ㅜㅜ 정말 슬프다.
숙소 얘기를 좀 하고 싶다. 여기도 너무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이름은 Combo Milano 이고, 나빌리오 운하 저쪽 끝에 있다. 약간 외져보이는 위치인데 밀라노가 그리 크지 않아서 불편하지 않은 거리이다. 아침마다 운하를 따라 산책삼아 걸으면 트램이나 지하철역까지 10-15분 내외이다.
보다시피 2층 침대가 아니라 아예 벽에 고정된 플로어를 사용하는 것이라 흔들림도 적고, 공간도 널찍하다. 매트리스 아래쪽으로 60cm정도의 공간이 더 있어서 캐리어나 짐을 이것저것 올려두기도 편하다. (물론 방 안에 개인라커도 있다.) 화장실도 매우 깨끗했고, 그냥 유일한 단점을 꼽자면 내가 사용한 방에는 안쪽에 창문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건 방마다 다른 것 같다. 출입문 위쪽이 창문처럼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답답하지는 않다.
1층에는 카페가 있는데, 역시 이탈리아답게 커피가 매우 저렴하고 맛있다. 메뉴에 샤케라또가 있어서 거의 매일 한 잔씩 먹었던 것 같다.
조식도 이곳에서 먹는데, 미리 결제해도 되지만 먹고싶은 날만 비용을 내고 먹을 수도 있다. (미리 결제하는게 저렴하긴 하다.) 당일에 계산하면 7유로정도였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사실 조식부페를 별로 기대하지 않아서 미리 지불하지 않았던 것인데, 어느날 아침에 보니까 가격대비 훌륭해서 한 번 먹었다. 그리고 조식부페에 커피 한 잔이 포함되어있어서 정말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날은 카페에서 판매하는 베이커리류와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외출했다.
왠지 피렌체 얘기는 별로 안 쓸 것 같은데, 피렌체에 비하면 밀라노는 구경할 곳이 확실히 적긴 하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 락다운 직전이었고, 마지막 날엔 거의 락다운이 시작되는 시점이라 미술관이 문을 전부 닫기 시작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ㅋㅋ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은 예약이 이미 몇달 전에 다 차서 건물만 보고 나왔다. 오전이라 그랬나, 아니면 비수기라 그랬나, 락다운 직전이라 그랬나, 아무튼 사람이 거의 없어서 조용했다. 그래서 뒤쪽 정원이 특히 마음에 들어서 한참 앉아있다 나왔다.
도착한 다음날 두오모 광장. 확실히 아직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떠나는 날 같은 광장. 사진에는 그래도 사람이 꽤 많아 보이는데, 처음 갔던 날에 비하면 정말 한적했다.
마지막 날은 어딜 가도 인파가 현저하게 적어서 기분이 참 이상했다. 대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예상한 것보다 한적한 편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런던이 락다운 직전 상황이 되니 기시감이 들었다.
본래 마지막날 가려고 했던 미술관들이 다 문을 닫아서 그게 좀 아쉬웠지만 나름 잘 돌아다녔다. 그냥, 가는 곳마다 다 닫혀서 트램만 엄청 오래 타고 돌아다녔다.
피렌체는 중간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그래서 그 많은 장소들을 다 가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고, 중요한 곳이랑 가고싶은 곳만 골라서 알차게 다녀왔다. 그 중에 하나로, 몸이 튼튼할 때 두오모 돔에 올라가봐야겠다 싶어서 도전했는데 솔직히 에펠탑보다 덜 힘들었다. 혹은 그 때보다 지금 체력이 더 좋아졌나보다.
돔 위에서 브루넬레스키 탑을 마주보고 왼편을 보면 언덕이 굽이굽이 보이는데, 그림 속에서 보던 언덕들 같아 신기했다. 어느 곳의 자연 풍경이 이전에 보았던 작품에 그려진 것과 똑 닮아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그냥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구나.
베키오 다리도 건넜다. 사진은 다리 위에서 찍은 것이라 다리는 보이지 않지만ㅋ
다리 양 옆으로 주얼리샵이 엄청 많았는데 해질무렵이라 노랗게 빛나는 창문들이 참 예뻤다. 뭔가 하나 사고싶기도 했지만 그런데 사치부릴 수 없는 입장이라 그냥 구경만 했다.
저때는 아직 3월도 되지 않았는데 남쪽으로 조금 내려왔다고 해가 참 길었다. 한달 사이에 이쪽도 해가 많이 길어져서, 오후 7시가 넘어도 밖이 푸르게 밝다. 점점 더 길어질텐데, 저녁 외출도 못하고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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