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크리틱 할 때 했던 말이랑 생각 정리.
같은 실기실 쓰는 친구의 작업에 대해 크리틱 하던 와중에 했던 말이므로, 그 친구의 작업에 대해 먼저 간단히 요약한다.
그 친구의 작업은 구체적인 내용이나 내러티브가 없이 형식으로만 이루어져있다. 캔버스 위에 '흘리기'를 통해 선을 탐구하는 것이라고 주로 말해왔는데, 그 기법에 매력과 흥미를 느끼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있는 것 같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한다.
개인적으로는 주제의식과 형식 중에 어떤 것이 먼저 선행하는가,라는 질문은 바보같다. 본질이 뭐냐, 무엇이 선행하냐는 질문은 이미 구시대적이기도하고, 실제로도 순차적/단계적으로 진행되는 사고가 어디있단 말인가. 항상 다수의 나선처럼 얽히고 섥혀서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 알 수 없이 꼬여있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나는 그렇다.)
좀 다른 길로 새버렸는데, 어쨋든 그 친구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 그의 작품을 관객이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게 하고싶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추상 작품의 숙명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진지하게 봐주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무언가를 느끼고 보아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뭐야'하고 그냥 지나가기 마련이라고 하셨다.
미술작품 또한 '취향'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음악이나 영화, 스포츠에도 취향이 있는데 하물며 미술에는 없을까. 더불어서 추상이 구상에 비해 일반인들이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걸 가지고 그들에게 '넌 왜 진지하게 볼 생각이 없냐'라던가 '넌 왜 아무것도 느끼질 못하냐'고 재촉하거나 몰아붙여서는 안된다. 뭐 다들 인정할 뻔한 얘기다, 이런 것들.
그렇지만 종종 미술도 '취향'의 영향을 받음을 잊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다. 특히나 그게 제작자의 입장일 때, 물론 많은 관객을 포섭하고 유혹하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욕심이지만, 내 유혹의 기술이 통하지 않는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자들까지 신경쓰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걸. 늦은건지 이른건지 모르지만 나는 여름 이후로 이런 생각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났다. 어차피 내가 데미안 허스트나 제프 쿤스 급의 '능수능란'한 작가가 될 것이 아니라면 욕심을 좀 덜고 편안하게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 (뭐, 그 전에 '작가'라는 직업군에 들어갈지도 의문이긴 하다.)
테이트모던에서 데이빗 아저씨가 보여준 작가는 나는 전혀 모르는 분이었다. 이젠 이름도 기억 안난다. 데이빗 아저씨는 그 작가가 너무 좋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뭐, 내 취향의 그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아니어도 데이빗 아저씨가 좋아하고, 또 런던 내의 다른 누군가가 좋아하고, 갤러리에 걸리고, 그림이 팔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소장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모두가 피카소와 뒤샹이 될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미래의 예술학과 학생이나 다른 미대 학생들이 매우 분노할지도 모른다. 시험범위가 많아서 괴롭다고.
'관객을 걸러낸다'라는 다소 거친 말을 썼는데 교수님이 맘에 드셨는지 그 단어를 사용해주셔서, 동의받았다는 것이 꽤 기분이 좋았다.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생각이지만, 물건을 판매할 때처럼 내 '작품'의 '주요감상층'을 어느 정도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60년대의 미국 관객들은 수준이 높아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작품을 다 이해하고 지적 충격과 깨달음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미니멀리스트들이 연극적이며 맥락 안에서 의미를 가지고 상호작용한다는, 조금은 어려운 설명들은 단지 비평가나 '예술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정 집단 내에서나 이루어지던 담론이지 않았을까. (불확실한 어투로 썼지만 거의 90퍼센트 이상 확신한다.)
교수님도 '범주 외의 관객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시더라. 뭔가 볼테면 보고, 아니면 말아라.
누군가는 이게 무책임하다거나 건방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비판에 대해서도 맘대로 하라고 말하고 싶다. 절대 가볍게 나온 생각이 아니므로 나는 당당하다.
글 쓰다 보니 지킴이 시간이 10분밖에 안남았다! 신나!
덧붙임)
초등학교 친구가 또 생각났다. 수련회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다 날 좋아하니"라고 말했던 현자같은 그 친구...
내 인생의 곳곳에서 등장해 영향을 미치는구나. 마치 사상의 뿌리같다.